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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클라르 장군에서 몽클라르 중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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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0:00:14,000 --> 00:00:19,300 몽클라르 장군에서 몽클라르 중령으로 2 00:00:20,400 --> 00:00:23,336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의 기습 침략으로 6·25전쟁이 발발했다 3 00:00:23,360 --> 00:00:26,296 전쟁은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2개월간 지속되었다 4 00:00:26,320 --> 00:00:28,216 전쟁 후 한국은 황폐화되었고 5 00:00:28,240 --> 00:00:31,348 5백만 명 이상의 사망자와 1천만 명의 이산가족 10만 명의 고아가 발생했다 6 00:00:31,440 --> 00:00:34,456 그러나 한국 국민과 한국군, 유엔군은 7 00:00:34,480 --> 00:00:37,416 힘을 합해 공산군의 침략을 막아내고 8 00:00:37,440 --> 00:00:40,150 한국과 민주주의를 수호해냈다 9 00:00:42,000 --> 00:00:45,666 6·25전쟁은 북한의 침략으로 발발했다 10 00:00:47,800 --> 00:00:49,776 유엔군이 참전했을 때 11 00:00:49,800 --> 00:00:52,789 남한의 영토는 10%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12 00:00:54,800 --> 00:00:56,816 한국군과 유엔군은 13 00:00:56,840 --> 00:01:02,818 인천상륙작전 이후로 영토를 점진적으로 탈환했다 14 00:01:03,640 --> 00:01:10,016 38선을 넘어 한반도를 통일하기 직전이었다 15 00:01:10,680 --> 00:01:12,513 그러나 16 00:01:12,720 --> 00:01:18,698 중국군이 수적 우위를 이용해 인해전술을 펼쳤다 17 00:01:19,760 --> 00:01:25,817 유엔군과 한국군은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18 00:01:26,920 --> 00:01:30,136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을 성공시키며 19 00:01:30,160 --> 00:01:35,699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수복했다 20 00:01:36,520 --> 00:01:41,541 서울이 다시 함락되었다 21 00:01:41,880 --> 00:01:45,227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22 00:01:46,240 --> 00:01:52,018 유엔군과 한국군은 반격에 나섰다 23 00:01:53,040 --> 00:01:57,256 자원병으로 구성된 중국군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4 00:01:57,960 --> 00:02:00,376 중국군은 물자 보급에 어려움을 겪으며 25 00:02:00,400 --> 00:02:05,939 공세를 이어 나갈 힘이 부족해졌다 26 00:02:06,400 --> 00:02:10,856 유엔군과 한국군은 북위 37도에서 반격을 준비했다 27 00:02:10,880 --> 00:02:13,856 리지웨이 장군은 제23보병연대의 프리먼 대령에게 28 00:02:13,880 --> 00:02:17,656 지평리 주둔을 명령했다 29 00:02:17,680 --> 00:02:24,096 "만약 우리가 지평리를 포기했다면 제9군단의 우측 측면이 발각되어 전선은 돌파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격하는 데 중요한 기점을 잃었을 것이다" 30 00:02:24,120 --> 00:02:27,336 - 미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 (1895~1993) - 31 00:02:27,360 --> 00:02:32,341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지평리를 사수해야 한다! 32 00:02:32,800 --> 00:02:36,576 미 제23보병연대 프랑스대대의 임무는 33 00:02:36,600 --> 00:02:42,378 지평리 남쪽에 있는 진지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34 00:02:42,720 --> 00:02:47,582 유엔 프랑스대대 사령관 랄프 몽클라르 중령 (1892~1964) 35 00:02:47,880 --> 00:02:53,101 58세의 그는 양차세계대전 참전 용사로 36 00:02:53,760 --> 00:03:00,615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장군 계급장을 포기하고 중령으로 참전했다 37 00:03:01,240 --> 00:03:06,221 그는 지평리 전투에서 프랑스대대를 지휘했다 38 00:03:06,800 --> 00:03:14,960 “중령이라는 계급이 편합니다. 곧 태어날 제 아들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유엔군에 지원한 최초의 군인 중 한 명이었던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습니다” 39 00:03:15,160 --> 00:03:18,416 지평리를 수호하기 위해 40 00:03:18,440 --> 00:03:24,896 병사들은 마을 산자락에 지름 18km의 원형 진지를 구축해야 했다 41 00:03:25,120 --> 00:03:26,936 하지만 42 00:03:26,960 --> 00:03:29,976 4개 대대, 고작 병사 5,600명으로 43 00:03:30,000 --> 00:03:33,387 병력이 심각하게 모자란 상황이었다 44 00:03:33,960 --> 00:03:38,256 따라서 이들은 고지보다 산자락에 주둔하기로 결정했다 45 00:03:38,280 --> 00:03:41,149 프랑스 대대 46 00:03:41,480 --> 00:03:44,496 진지를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47 00:03:44,520 --> 00:03:51,375 이들은 지름 1.6km의 방어 체계를 구축한다 48 00:03:51,720 --> 00:03:57,100 병사들은 대인지뢰와 조명지뢰를 이용해 배치를 완성하고 49 00:03:57,400 --> 00:04:01,265 십자포화를 설계한다 50 00:04:01,480 --> 00:04:04,456 한편, 제39군단 3개 사단 소속 51 00:04:04,480 --> 00:04:08,027 중국군 50,000명이 지평리를 포위했다 52 00:04:08,480 --> 00:04:11,456 1951년 2월 13일 오후 5시 30분 53 00:04:11,480 --> 00:04:16,182 중국군은 인해전술로 공격해왔다 54 00:04:16,600 --> 00:04:19,696 중국군의 피리와 꽹과리는 55 00:04:19,720 --> 00:04:24,303 적에게 심리적인 영향을 주었다 56 00:04:24,440 --> 00:04:26,273 그 때 57 00:04:26,880 --> 00:04:30,016 중국군이 피리와 꽹과리 소리를 듣지 못해 58 00:04:30,040 --> 00:04:35,779 전방에서 점점 동요했다 59 00:04:36,760 --> 00:04:41,821 바로 프랑스군의 사이렌 소리 때문이었다 60 00:04:42,200 --> 00:04:46,065 프랑스대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중국군을 공격했다 61 00:04:47,600 --> 00:04:51,505 총검으로 62 00:04:52,200 --> 00:04:57,181 육탄전을 벌이며 승리했다 63 00:04:57,720 --> 00:05:04,495 3일 간의 전투, 영하 30도의 추위, 엄청난 수적 열세... 64 00:05:05,160 --> 00:05:06,993 그러나 65 00:05:07,560 --> 00:05:12,422 프랑스군은 사이렌을 울리며 피리와 꽹과리 소리에 맞섰고 66 00:05:12,880 --> 00:05:15,988 탄약이 부족했지만 육탄으로 싸웠다 67 00:05:16,320 --> 00:05:22,537 제5기갑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지평리 진지를 지켰다 68 00:05:24,320 --> 00:05:29,576 프랑스군의 투지는 그들이 모두 자원병인 점과 69 00:05:29,600 --> 00:05:36,056 자유를 수호하고자 하는 굳센 의지에서 기인했다 70 00:05:36,720 --> 00:05:39,976 지평리 전투 승리 이후 71 00:05:40,000 --> 00:05:44,463 유엔군과 한국군은 신뢰를 회복했다 72 00:05:45,320 --> 00:05:49,305 그리고 주도권을 잡았다 73 00:05:51,880 --> 00:05:55,176 지평리 전투의 승리는 74 00:05:55,200 --> 00:06:04,844 자유가 계급보다 중요하다는 몽클라르 장군의 신념 덕분이었다

자료정보

목록
원명칭
Du général au lieutenant-colonel Monclar
한국명칭
몽클라르 장군에서 몽클라르 중령으로
출처
유엔 프랑스 한국전쟁 참전협회 소장 자료
요약
한국전쟁의 전시상황과 함께 몽클라르 장군의 지휘 아래 치른 지평리 전투를 소개한다. 리지웨이 장군은 중요한 거점으로서의 지평리를 지킬 것을 명령한다. 몽클라르는 병사 5,600명으로 이루어진 4개 대대인 제23보병연대 프랑스대대를 지휘한다. 영하 30도의 추위, 인해전술을 펼치는 중국군의 공격, 이에 비해 엄청난 수적 열세를 견디며 프랑스 대대는 지평리 남쪽의 진지를 방어한다. 중국군이 피리와 꽹과리로 압박감을 주는 심리전술을 펼치자 프랑스 군은 사이렌 소리로 대응하는 등, 프랑스 대대의 활약으로 전세의 주도권을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