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은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하기 전까지는 부상포로에게 비교적 적절한 치료를 해주었고 트럭으로 후송되었으며
수용소에서도 잘 돌보아 주었다고 하나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직후인 1950년 10월부터 포로에 대한 대우는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이 시기 포로들은 군화나 코트 등을 빼앗겼습니다.
1950~1951년 겨울에 붙잡힌 포로들은 영하 25도를 오르내리는 한겨울에 도보로 행군하면서 북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포로들은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부상과 질병에 대한 치료를 받지 못해서
이질, 폐렴 등으로 죽거나, 낙오자나 탈출을 시도하여 피살되기도 하였습니다.
심한 경우에 700명의 미군포로가 도보로 행군을 시작하였는데
수용소에 도착하였을 때는 250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이 행군은 ‘죽음의 행군’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 후 수용소가 정비됨에 따라, 포로들은 임시수용소에서 영구수용소로 옮겼습니다.
수용소는 제1수용소에서 제14수용소까지 나누어 존재하였으며, 압록강을 따라 80㎞에 걸쳐 있었습니다.
미군포로들이 중국군 포로수용소에서 경험한 고문, 세뇌 등에 대한 기록은 많습니다.
또한 수용 중 공산측에 협력하였던 일부 포로는 귀환 후에도 의심을 받아야 했습니다.
6·25전쟁 당시 북한과 중국군은 포로들을 압록강 인근 벽동과 창성 등지의 수용소에 수용했습니다. 이들 수용소 중 일부는 철조망조차 없이 민가에서 생활하게 하며 관리되었지만,
포로들은 그곳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행진’이라 불릴 만큼 긴 거리를 강제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수용소 초기에는 극심한 식량 부족과 열악한 위생 상태로 인해 많은 이들이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살아 돌아온 포로들 또한 전쟁 포로로서의 트라우마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더욱이 일부는 세뇌나 적군과의 협력을 의심받으며 사회적 냉대와 조사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