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전쟁이 시작된 이후,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북한군에 의해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전세 역전을 위해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주력 부대를 고립시킬 수 있는 대규모 상륙작전을 구상했습니다.
인천은 서울과 가까워 전략적 중요성이 높았지만,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좁은 수로를 가지고 있는 등 상륙작전에는 매우 불리한 지형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이 예상치 못한 지점을 노려 기습 효과를 극대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결국 인천이 상륙 지점으로 결정되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해 미 제1해병사단과 대한민국 해병대 등이 주축이 된 유엔군 병력이 인천 월미도에 상륙하며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함포 사격과 공중 폭격으로 북한군의 방어 시설을 무력화한 후, 치열한 교전 끝에 상륙 부대는 월미도를 장악하고 인천 시내로 진격했습니다.
이어서 유엔군 본대가 인천항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했습니다.
1950년 9월 18일까지 진행된 인천상륙작전으로,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에 집중되어 있던 북한군의 허를 찔러 후방을 강타했습니다.
보급선이 차단되고, 주력부대가 고립되어 궁지에 몰린 북한군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엔군은 서울을 향해 진격했으며,
치열한 시가전 끝에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군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상륙작전 중 하나로 기록되며 6·25 전쟁의 향방을 크게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참고자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역사속 오늘: 6·25 전쟁의 판도를 바꾼 결정적 순간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기념관, http://www.landing915.com/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제6권, 2009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 시 상륙작전』, 2023
인천상륙작전에는 항공모함과 구축함, 순양함 등 8개국 261척의 함정과 제10군단으로 편성된
대규모 선단이 투입됐으며 작전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50년 9월의 월미도
1950년 9월 13일
인천상륙작전 이틀 전에 폭격당하고 있는 월미도
<참고자료 및 자료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역사속 오늘: 6·25 전쟁의 판도를 바꾼 결정적 순간 인천상륙작전 』, 인천상륙작전기념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제6권, 2009,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 시 상륙작전』,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