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H, 의료선, 그리고 현장의 치유자들 의료지원, 생명을 잇다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 회원국들은 전쟁이 발발한 이후 저마다 처한 안보상황을 고려해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한 5개국도 유엔헌장에 명시된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수호한다”는 대의를 따라 참전을 결정했습니다.

의료지원 숏츠영상

의료지원국

스웨덴국기 스웨덴

참전연인원(명)
1,124
근무인원(명)
170
지원부대 및 시설
스웨덴
적십자병원

스웨덴은 중립국이었으나 1개 야전병원단의 파견의사를 밝혔습니다.
1950년 8월 28일 스톡홀름을 출발한 야전병원단은 1950년 9월부터 1957년 4월 철수할 때까지 6년 6개월 동안 의료지원을 하였으며 6·25전쟁에 파견된 의료지원부대 중 가장 오랫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많은 중환자를 치료했습니다.

1950.9.
의료진 부산 도착
1950.9.
적십자병원 진료 개시
1951.6.
민간진료 개시
1952.5.
민간인 진료소 개소
1954.12.
민간인 치료병원으로 재편
1957.4.
적십자병원 철수

덴마크 국기덴마크

참전연인원(명)
630
근무인원(명)
100
지원부대 및 시설
병원선
(유틀란디아호)

덴마크는 유엔 회원국 중에서 제일 먼저 지원의사를 밝혔습니다.
병원선 유틀란디아(Jutlandia)호는 1951년 1월 23일 함머리치(Kai Hammerich) 준장의 지휘 하에 덴마크를 떠나 전장에서 많은 환자들을 진료했습니다.
이 병원선은 8개월마다 덴마크로 귀국해 재정비한 후 재차 파견되었습니다.

1951.3.7.
유틀란디아호, 부산 도착
1951.6.30.
유엔군사령관, 휴전회담 장소로 유틀란디아호 제의
1951.7.24.
유틀란디아호 제1차 파견 임무 마치고 출항
1951.11.26.
유틀란디아호 2차로 부산 도착
1952.3.29.
유틀란디아호 2차 파견 임무 마치고 출항
1952.11.20.
유틀란디아호 3차로 인천 도착
1953.8.16.
유틀란디아호 귀국

노르웨이 국기노르웨이

참전연인원(명)
623
근무인원(명)
109
지원부대 및 시설
이동외과
병원

노르웨이 정부는 해상운송지원을 제의했으며, 이어 적십자를 통해 지원금과 의류 등을 보내왔습니다. 노르웨이 적십자가 편성한 이동 외과병원은 1951년 5월 31일 자국을 출발해 대한민국에 도착한 후 동두천에서 미 제1군단을 직접 지원해 부상자들을 치료했으며, 군인은 물론 민간인들을 위한 외래환자 진료소도 설치·운영했습니다.

1951.6.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 한국 도착
1951.7.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 개소
1951.12.
동두천에 외래진료소 개소
1952.8.
노르웨이 군의관, 치과진료 개시
1953.11.
이동외과병원 운영 종료

이탈리아 국기이탈리아

참전연인원(명)
128
근무인원(명)
72
지원부대 및 시설
제68
적십자병원

6·25전쟁 발발 당시 이탈리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창설국이었으나 유엔 회원국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적십자연맹의 요청에 따라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탈리아 제68적십자병원은 1950년 10월 16일 자국을 떠나 1개월 만에 대한민국에 도착했습니다. 이탈리아는 6·25전쟁에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한 마지막 국가가 됐을 뿐만 아니라 참전국 중 유일한 유엔 비회원국이란 기록을 세웠습니다.

1951.11.
제68적십자병원 부산 도착
1951.12.
서울 우신초등학교에 병원 개소
1951.12.
민간인진료소 설치
1952.11.
화재로 병원 소실
1953.2.
병원 신축 완료
1955.1.
제68적십자병원 철수

독일 국기독일

참전연인원(명)
437
근무인원(명)
193
지원부대 및 시설
적십자
병원

유엔 비회원국이었던 독일(당시 서독)도 의료지원 활동을 하였습니다. 서독 정부는 미국과 유엔에 1953년 4월 야전병원 파견을 제의한 뒤, 1954년 5월부터 1959년 3월까지 부산에 적십자 병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습니다. 5년간 서독 적십자 병원은 입원환자 및 외래환자를 포함 약 30만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하였습니다.

1954.1.
선발대, 서울 도착
1954.2.
의사, 간호사 48명 부산 도착
1954.5.
부산에서 적십자병원 개원
1955.6.
한국 의사 재훈련 실습 지원 개시
1959.3.
적십자병원 폐원

인도 국기인도

참전연인원(명)
627
근무인원(명)
331
지원부대 및 시설
제60
야전병원

인도는 유엔의 민간인 구호결의에 찬성해 의료지원부대 파견을 결정했습니다. 란가라지 중령이 지휘한 제60야전병원은 1950년 11월 20일 부산에 상륙해 영국 제27여단을 지원했습니다. 인도 야전병원은 수준 높은 수준높은 의술을 발휘하였습니다.

1950.11.
제60야전병원 부산 도착
1950.12.
제60야전병원 대구파견대, 병원 개소
1951.3.
이동외과반, 문산 공수투하작전 지원
1952.6.
대구파견대, 민간병원 순회진료 개시
1953.9.
인도 포로송환관리단(Custodian Force)과 합류
1954.2.
귀국

미 육군이동외과병원(MASH: Mobile Army Surgical Hospital)

미 육군이동외과병원(MASH)은 미국 육군이 고안한 야전병원 의무부대 편제로, 제2차 세계 대전 후 개념이 정립되었으며 6∙25전쟁에서 최초로 본격적으로 운용되었습니다. 미 육군이동외과병원(MASH)은 미군을 비롯한 프랑스군, 영국군, 캐나다군 등의 유엔군과 한국군, 민간인, 포로 등을 치료하였습니다. 그들의 의료기술은 수혈, 흉부외과, 마취기술, 예방의학, 환자 후송체계 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목표 및 특징
미 육군이동외과병원의 핵심 목표는 전선(Front Lines)과 최대한 가까운 곳에 병원을 설치하여 부상병들이 수술 및 긴급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후송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부상 후 첫 1시간인 '골든 아워(Golden Hour)' 내에 치료를 제공하여 생존율을 크게 높이기 위함이었습니다.
미디어 영향
항공 앰뷸런스(Air Ambulance) 헬리콥터를 이용한 항공 의무 후송(MEDEVAC) 시스템이 발전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덕분에 후송 후 사망률이 제2차 세계 대전의 4%에서 6.25전쟁에서는 2.5% 수준으로 감소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의료 발전 기여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 영화, TV 시리즈 《MASH》를 통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 작품의 원작자 리처드 후커(Richard Hooker, 본명 H. Richard Hornberger) 박사는 실제로 6.25전쟁 당시 제8055 육군이동외과병원 의사로 복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습니다.
<참고자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과 유엔군」 KBS, 「6.25 기획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이동외상센터>,
김우성, 「M.A.S.H. : 이동외과병원 」 (2025. 6.25.) Booker King,
JOURNAL OF THE NATIONAL MEDICAL ASSOCIATION,
「The Mobile Army Surgical Hospital (MASH): A Military and Surgical Legacy」 (2005),
Matthew Bradley, Current Problems in Surgery,
「Combat casualty care and lessons learned from the past 100 years of war」 (2017),
Craig D Newgard, 미국 군의무국 역사 유산 센터, 「AMEDD Center of History &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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