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 한사람, 그들이 곧 방어선이었다.
6∙25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대한민국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최후의 방어선을 낙동강 일대에 구축했으며, 이곳이 바로 낙동강 방어선입니다.
부산은 당시 대한민국의 임시 수도이자 유엔군의 보급 및 증원 거점이었기 때문에 이 방어선 사수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북한군은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낙동강 방어선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펼쳤습니다.
유엔군과 국군은 "사수 아니면 죽음(Stand or Die)" 이라는 비장한 각오로 치열하게 저항했으며,
다부동 전투, 마산 전투, 창녕·영산 전투, 안강·기계 ~ 영천·신녕 전투, 포항 전투 등 여러 격전이 방어선 전역에서 벌어졌습니다.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미 본토의 제2사단과 제1해병여단, 하와이의 제5연대전투단이 한반도에
상륙하였으며 이때 6개 전차대대가 6·25전선에 투입되어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전투 중 홍콩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27여단이 증원되는 것을 계기로, 전투 작전 편성이 한미연합군 중심에서
유엔군까지 확대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전투 초반의 열세를 딛고 병력과 장비 면에서 점차 북한군을 능가하게 되었으며,
낙동강이라는 천연 장애물을 활용하며 방어를 공고히 하였습니다.
이때,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방어에서 공격으로, 수세에서 공세로의 대전환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